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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평생 지역 발전 씨앗 심은 ‘푸른 눈의 제주인’
 글쓴이 : 김녕미로공원   조회 : 16,320  작성일 : 18-10-22 11:38  

[2018 제주&제주인] 3. 프레드릭 더스틴

제주대 교수 재직하면서 관광수익 선순환 강조
김녕미로공원 조성해 수익금 대부분 지역 환원
관광·경영학 실습 무대 제공 등 교육에도 헌신

 故 프레드릭 더스틴 전 ㈜제주김녕공원 대표는 1971년 제주에 정착해 88세를 일기로 별세한 2018년까지 제주관광의 발전과 인재 육성을 위해 헌신했다.
 
“제주에서 발생한 관광 수익은 제주에 머물러야 한다. 지역의 관광 수익이 외부로 반출된다면 지역 주민들의 삶은 윤택해지기 어렵다”.
제주관광의 오랜 난제인 ‘관광수익 선순환 모델’ 구축을 무려 50여년 전부터 실현해 온 ‘푸른 눈의 제주인’이 있었다. 지난 5월5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 프레드릭 더스틴(Frederic H Dustin) 전 ㈜제주김녕미로공원 대표는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라는 철학과 ‘관광 수익 지역 환원’이라는 신념을 지키며 일평생 오직 제주를 위해 살았다. 미로공원의 모든 나무를 손수 식재한 그는 지역사회 곳곳에 제주의 발전을 위한 커다란 씨앗을 심었다. 그의 삶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제주에 심어놓은 씨앗이 제주를 지킬 숲이 될 때까지 그의 신념과 철학은 오롯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 “아내가 좋아하는 제주로”

1930년 미국 워싱턴 주에서 2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난 더스틴 대표는 1952년 미8군 제7연대 소속 연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며 처음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었다.

웨스턴 워싱턴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당시 연희대(연세대)와 중앙대에서 영어 강사로 재직했으며, 한국일보 카피리더를 비롯해 양계회사 전무이사, 미국투자 담당관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더스틴 교수의 제주행은 아내와의 결혼 덕분이었다.

그의 아내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로, 해외 여러 독지가와 단체에 한국에 대한 구호물자 지원을 요청하는 일을 했다.

더스틴 대표는 제주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이주를 결심, 1971년 제주에 보금자리를 꾸리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김녕미로공원 전경
김녕미로공원 전경
# 미로공원 조성 “신념을 현실로”

제주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더스틴 대표는 1983년 관광학과가 생겨나면서 해당 과 객원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더스틴 대표는 관광은 발전했지만 자본에 예속돼 주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 일부 도시들의 사례를 보면서 ‘제주는 이런 식으로 개발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게 관광수익 선순환 모델을 연구한 더스틴 대표는 ‘지역 관광수익은 지역에 머물러야 한다’라는 자신의 신념을 미래에 제주관광을 이끌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더스틴 대표는 교육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관광수익 지역 환원을 현실화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제주김녕미로공원 조성 프로젝트다.

미로공원이라는 아이디어는 우연처럼 다가왔다.

해외 조경잡지에 게재된 제주 흑돼지 관련 글을 읽던 더스틴 대표는 바로 다음 장에 실린 세계적인 미로 디자이너 에드린 피셔(Adrian Fisher)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미로공원 조성을 마음먹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당시 더스틴 대표는 에드린 피셔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고 국제전화를 주고받으며 ‘제주 역사의 기행’이라는 주제로 미로 제작을 의뢰했다.

더스틴 대표의 의지에 반한 에드린 피셔는 더스틴 대표로부터 소개 받은 제주의 상징 7가지를 미로로 디자인해 전달했다.

3년에 걸쳐 미로 디자인을 마친 더스틴 대표는 1987년 처음으로 영국에서 수입한 랠란디 나무를 심으며 공원 조성에 박차, 8년만인 1995년 제주김녕미로공원의 문을 열었다.

관광 수익을 지역에 환원할 수 있는 무대가 완성된 것이다.


故 프레드릭 더스틴 대표와 김영남 대표
# “사람에 투자해야 한다”

김녕미로공원의 설립 목적은 그대로 현실이 됐다.

더스틴 대표는 김녕미로공원이 수익을 내기 시작한 2003년부터 곧바로 지역 환원에 나섰다.

더스틴 대표는 외국인 교수 채용 인건비 3000만원을 시작으로 매년 4000~5000만원씩, 많게는 1억원씩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제주대에 수익금을 기부했다.

또 마을 노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김녕노인대학에 매년 1000만원의 운영비를 지원했다.

지난해까지 제주대와 김녕노인대학에 기부한 수익금은 모두 9억3000만원이다. 개장 당시 컨테이너 사무실과 미로가 전부였지만 김녕미로공원을 통한 수익 환원은 지역사회에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

더스틴 대표가 관광수익 지역 환원만큼 중요시 했던 신념 중 하나는 바로 ‘사람’이다.

전후 혼란했던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제주에서 관광학 교수로 교편을 잡은 이유는 ‘사람에 투자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더스틴 교수와 함께 김녕미로공원을 이끌고 있는 김영남 대표이사는 “더스틴 대표는 학생들을 올바로 가르쳐 지역사회를 위한 일꾼으로 키워내는 걸 매우 중요시했다”라며 “기부만이 아닌 제주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육성하는 것 역시

김녕미로공원을 통한 환원임을 강조했다”라고 회상했다.

실제 더스틴 교수는 여름 야간개장 때마다 학생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관광 사업 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추진할 수 있는 일종의 ‘실습 무대’를 제공한 것이다.

또 2003년 김녕초․김녕중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요트 교육을 실시할 때에도 학원과 계약을 맺고 영어수업을 함께 진행했다.


# “제주인이라서 자랑스럽다”

더스틴 대표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제주를 위해 평생을 살아온 제주인이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북제주군으로부터 명예군민증을 받은 것을 굉장히 기뻐했다는 주변인들의 회상처럼 본인 역시 제주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더스틴 대표가 김 대표이사에게 전한 마지막 부탁은 “존경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제주도에 김녕미로공원이 있어서 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라는 당부였다.

김 대표이사는 “더스틴 대표가 심은 씨앗이 결실을 맺고 커다란 숲을 이룰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위한 환원과 사람에 대한 투자에 더욱 힘쓰겠다”라며 “‘끊임없이 연구하는 학자’ ‘유쾌한 고양이 애호가’ ‘검소하고 부지런한 교수님’ 등 우리의 기억 속 더스틴 대표는 이곳 김녕미로공원에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고 말했다.

 

[더스틴 대표의 ‘학자’로서 걸어온 길]


미국 최초로 한국연구 석사 학위 발표

더스틴 대표는 학자이자 교육자로서도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했다.

더스틴 대표는 1948년 마운트 베이커 고등학교(Mt. Baker Highschool)를 졸업한 후 1954년 웨스턴 워싱턴 대학교(Western Washington Univ.)에서 교육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58년 워싱턴 주립대학교(Washington State University)에서 논문 ‘불꽃을 통해 본 한국 현대문학의 한 측면’으로 동아시아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발표한 논문은 미국에서 최초로 발표된 한국연구 관련 석사학위용 자료였다.

한국에 정착한 더스틴 대표는 당시 연희대(연세대) 재직을 시작으로 중앙대, 홍익대, 제주대에서 교편을 잡아 영어과 관광학을 가르쳤다.

특히 미래 제주를 이끌 제자들에게 ‘관광수익 선순환 모델’을 강조하는 등 제주관광의 질적 성장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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